“영어교육도시에 짓는 학교는 귀족 학교가 아니다. 조기유학층을 겨냥한 학교다. 해외 유학보다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동일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외화 유출과 학부모 부담을 줄일 수 있지 않겠나.” (박철희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교육담당 팀장)
“영리학교 허용은 우리 교육의 근간을 허무는 시도다. 이명박 정부가 제주도를 ‘신자유주의 임상실험실’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서울이 국제중학교 문제로 들썩이는 사이 바다 건너 제주도는 ‘영어교육도시’ 문제로 들끓는다. 한쪽에선 ‘제주도 발전의 계기’라며 기를 쓰고 찬성하는 반면, 또 다른 쪽은 ‘귀족·영리학교 설립을 중단하라’며 사활을 걸고 반대한다. 제주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제주 영어교육도시 사업은 제주도에 대규모 국제학교 특구를 만드는 계획이다. 국무총리실이 입법 예고한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법률안’에 따르면 제주도에 들어설 국제학교는 ‘내국인을 대상으로 영어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를 말한다. 국어와 사회 교과만 1주일에 2시간 이상 이수하면 학력도 인정된다. 사실상 제주도에 ‘영어몰입교육 타운’이 들어서는 셈이다.
사업 규모도 엄청나다. 서귀포시 대정읍 일대 386만㎡(116만 평) 부지에 초·중·고 12개 학교와 주거·상업 단지 등이 들어선다. 학생 수 9000여 명에, 사업 비용만 해도 1조4000억원에 이른다.
영어교육도시를 지으려는 정부 측의 논리는 단순하다. 부잣집 자녀의 해외 유학이 대세이므로 국내에 유학과 똑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교육 특구를 만들어 외화 낭비를 막자는 것이다. 여기서 ‘귀족 학교’ 논란은 일단 접자. 교육도시를 추진하는 쪽에서조차 “귀족까지는 아니어도 중산층 학교인 건 맞다”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제주도에 자녀를 유학 보낼 ‘중산층’ 부모가 있느냐는 점이다. 이번 사업의 실무를 담당한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측은 영어도시의 잠재 수요층이 45만명이라고 주장한다. 이 수치는 월 소득 300만원이 넘는 가구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JDC가 자체 조사를 벌인 결과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잠재 수요층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 지적한다.
2006년 기준으로 국내 초·중·고교 유학생 숫자는 모두 3만5000명이다. 이 중 유학 비용이 많이 드는 미국과 캐나다에 간 유학생은 1만7000명 수준이다. 전체 유학생과 비교해 13배, 미국·캐나다 유학생과 비교하면 26배나 많은 수치다. 조기유학 붐을 감안하더라도 과도한 셈법이다.
설령 이 수요층을 인정한다 해도 문제는 첩첩산중이다. 잠재 수요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학비가 해외 유학보다 저렴해야 하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외국의 유명 학교가 들어와야 한다. 박철희 JDC 교육팀장은 “등록금 액수는 학교의 재량에 달렸지만, 연간 4000만원씩 드는 미국보다는 훨씬 쌀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적어도 연간 2000만원 이상은 들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컨대 JDC 측이 유치를 희망하는 영국의 킹스칼리지 주니어스쿨은 1년 학비만 1900만원에 이른다. 부대비용을 감안하면 ‘제주 유학 비용’은 2000만원을 훨씬 웃돈다.
허점은 더 있다. 제주영어도시가 외국과 달리 ‘국내 사교육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권영길 의원실 정용상 보좌관은 “국제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하교 후 대자연에서 뛰어놀 리가 없다. 134만㎡(40만평) 규모의 주거·상업 공간이 ‘학원 천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지적한다. 영어도시가 ‘거대한 대치동’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박철희 팀장은 “상가 시설에 학원이 들어올 수 있다”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수학 과외가 이뤄지는 만큼 별 문제가 안 된다”라는 시각이다.

8월19일 영어도시 관련 공청회장 입구에서 영리학교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외국 유명 학교 유치가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이를 위해 정부가 내놓은 고육책이 이른바 ‘과실송금’ 허용이다. 과실송금이란 쉽게 말해 학교법인이 학교에서 번 돈을 다른 곳에 보내는 행위를 말한다. 학교의 영리사업을 금하는 현행법에선 과실송금이 금지돼 있다. 하지만 과실송금이 허용될 경우 외국 학교는 제주도에서 벌어들인 수익금을 본국으로 보낼 수 있다. 외화 유출을 막겠다는 정부의 호언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제주영어도시에 진출할 국내 사립학교 처지에서도 과실송금 허용은 ‘사학의 꿈’이 실현될 절호의 기회다.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설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반대론자들이 제주 국제학교를 ‘영리학교’라며 비꼬는 까닭이기도 하다. 더욱이 제주도에 진출한 사학이 학교에서 돈을 벌어가는데 다른 사학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제주와의 역차별 문제를 제기하며 ‘영리 행위 보장’을 요구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결국 ‘3불 정책’(기여입학제·본고사·고교등급제 금지)과 함께 교육 정책의 근간이었던 영리법인의 학교 운영 규제가 전국적으로 풀릴 공산이 크다. 이쯤 되면 일각에서 제주영어도시 추진을 공교육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교육 쿠데타’로 규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박철희 팀장은 “우리도 그런 염려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영어도시 추진을 제주도 일부 지역으로만 한정했다. 영리학교가 전국으로 확산된다는 건 반대론자의 추측일 뿐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도 “싱가포르나 홍콩 등에선 교육법인의 영리활동을 규제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최근 영리병원 추진 문제가 주민 반대로 무산되는 등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제주도는 민영화의 실험실이 되고 있다. 하지만 영어도시처럼 명분도 타당성도 없이 사업을 밀어붙이는 한, 이른바 ‘이명박식 실용’이 제주에서 먹힐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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